"나쁜 판사가 좋은 재판 할 수 없다"..'순수한 자발적 성매매 없다' 판결 박주영 판사 [커버스토리]
김민아 선임기자 입력 2020.11.07. 06:00
박주영 울산지법 판사 '친절한' 판결문 쓰는 이유
[경향신문]
■‘왜 이겼는지, 왜 졌는지’ 말해주는 친절한 판사님
“‘의원님들, (예산) 살려주십시오’ 한번 하세요.”
지난 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조재연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향해 말했다. 법원의 판례
모음인 ‘법고을LX’ 사업 예산이 전액 깎인 것을 언급하면서다. ‘의원 갑질’ 비판이 나오자 박 의원은 뒤늦게 사과했다.
풍경은 상징적이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분쟁을 법원으로 가져간다. 법원은 판단자의 권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예산을
편성하거나 법관을 증원할 권력은 없다. ‘양승태 사법부’는 사법의 권위를 활용해 권력을 얻고자 했다. 구체적 과녁은 상
고법원이었다. 참담한 실패의 자리엔 ‘사법농단’의 악취만 남았다. 법원은 존립 기반인 권위조차 위협받게 되었다. 금기로
간주되던 ‘판사 실명 비판’이 넘쳐난다.
법원의 권위, 법관의 신뢰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름길은 없다. 주목받는 권력형 비리에서부터 시골 법원의
소액사건에 이르기까지 ‘좋은 재판’을 하는 길뿐이다. 울산지법 형사합의11부의 박주영 부장판사(52)는 그런 노력을 하는
법관 중 한 사람이다.
박 부장판사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다. 변호사로 일하다 법원에 왔고, 부산고법 관내(부산·창원·울산지법 등)에
서 주로 일해왔다. 스스로를 ‘승무판’(승진과 무관한 판사)으로 부른다. 그의 시선은 조금 다른 곳에 가 있다. 새롭고 의미
있는 판결문을 쓰는 일이다. 왜 이렇게 형을 정했는지 설명하는 ‘양형 이유’에 공을 들인다.
지난달 8일 박 부장판사는 가출청소년 등을 유인해 성매매를 강요한 피고인 12명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형량을 모두 합
치면 102년이다. 피고인들은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응했다’고 했으나 박 부장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5장 분량의 양형 이유에서 헌법재판소 결정문과 법학자·여성학자들의 논문, 반성폭력 활동가의 보고서 등 7개 논
거를 인용해 “순수한 자발적 성매매는 없다”고 선언했다.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피고인들이 경제적 이유 등 피해자의
다양한 약점을 이용”했으며 “디지털로 소통하고, 실시간 전파되는 평판을 두려워하는 세대적 특성을 이용해 피해자들을
위협하거나 길들였다”는 것이다.
박 부장판사는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신전이 있는데, 인간의 몸”이라는 독일 시인 노발리스의 말을 인용하며 “타인의 몸을
거래하는 행위는 신의 전당을 파괴하는 범죄”라는 말로 양형 이유를 맺었다. 지난 2일 울산지법에서 그를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긴 싸움 한 이들에 판결 이유 충분히 설명 않는다면 무슨 소용…나쁜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할 수는 없다”
박주영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재판은 말과 글로 이뤄진다”고 했다. 그가 당사자의 말을 더 듣고, 판결문을 더 공들여 쓰
는 이유다. 지난 2일 울산지법 앞에 섰다. 권호욱 선임기자
“판사의 개인적 외부소통은 자제해야 하지만 판결로는 충실히 소통해야”
‘순수한 자발적 성매매는 없다’ 판결로 주목
“법원서 누군가는 선제적으로 소수자인 여성 입장 전하는 스피커 돼야”
박주영은 사법연수원을 마칠 때 “성적이 바닥”이라 법원에 지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택한 뒤 부산의 해상 전
문 로펌에서 2년, 단독 개업 1년, 월급쟁이 변호사로 4년 일했다. 2005년 변호사 등 법조 경력자를 판사로 임용하는 법조
일원화 제도가 도입될 무렵, 같이 일하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법원행을 권유했다. “박변, 당신은 아무리 봐도 법원 체
질 같은데, 한 번 지원해 보는 게 어때?” 그 한마디가 인생행로를 바꿨다.
- 변호사와 법관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험한 당사자들에게 시달리는 게 성격상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판단자의 지위에 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납득할
수 없는 패소 판결문을 뜯어보면서, 도대체 판사라는 작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변호사로
그냥 정체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고요.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로펌에서 근무할 때 새로운 걸 배운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단독 개업해 보니 죄다 이혼소송이나 간단한 민형사 사건만 다루게 되더군요. 법원에 와서 겪어보니 법원 경력 1년이 변
호사 경력 7년보다 훨씬 더 많이, 더 깊이 사건을 처리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판결문에 ‘양형 이유’를 상세하게 기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사건의 양형 이유를 상세히 적는 건 아닙니다. 범죄에 사회구조적 문제가 깊이 개입되어 있는 사건(가정폭력, 아동
학대, 산업재해 등), 사회구성원들이 쉽게 알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사건(정신질환자 사건 등), 법원 내부에서 누군가는
좀 다른 시각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는 사건(성범죄 사건 등)에 대해선, 가능한 한 양형 이유라는 형식을 통해 전후 사정
과 맥락, 사건의 의미와 메시지를 담으려고 합니다.”
- 변호사 시절 경험과 관계가 있나요.
“변호사 할 때 납득하기 힘든 게 판결문의 흠결이었습니다. 이기든 지든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하는데, 휑한 판결문을
보니 답답해 미치겠더군요. 그래서 저는 판사가 되면 최대한 성실하게 설명해 주리라 다짐했습니다.”
- 법원 내 우려는 없었습니까.
“제가 판결을 장황하게 쓰니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 우려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상세히 쓰다 보면 틀릴 확률이 높다는 거
죠. 인터뷰할 때 말실수할까 봐 말을 아끼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얼마 전까지 법관의 업무 부담을 줄이는 방안으로
‘판결문 간이화’ 정책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사자가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을 싸웠는데, 주장을 받아주는 이유와 배척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판결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박주영이 말하는 ‘양형 이유를 길게 쓰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당사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준다. 둘째, 상급심 판단에
도움을 준다. 셋째, 사회구조적 문제가 개입된 사건은 사건의 실체를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적 사건도 금방 묻
힌다. 넷째, 판사의 주된 소통 수단은 판결이다. 다섯째, 자족성·완결성을 갖춘 판결은 사회적 기록이자 사료로 남는다.
- 동료 법관들은 뭐라고 합니까.
“대부분 법관들은 제가 길게 쓴 양형 이유를 특이하게 봅니다. 이렇게도 쓸 수 있나, 이렇게 써도 되나, 하고 말이죠. 저
역시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2007년 형사합의부 우배석 시절 부장님(고종주·현 변호사)이 제 스타일을 이해해 주셔서, 죽
이 맞아 신나게 썼습니다. 지금도 아마 싫어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저는, 판사의 개인적 외부소통은 자제돼야 한다고 믿
습니다. SNS도 일절 하지 않아요. 하지만 판결로는 충실하게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달 ‘가출 청소년 성매매 강요 사건’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면서 밝힌 양형 이유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다수 논
문과 서적을 인용하면서 ‘순수한 자발적 성매매는 없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는데요.
“저는 법의 목적이나 이념 등 거창한 가치를 떠나, 다수나 권력자가 소수나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상태가 체질적으
로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 점에서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범죄는 최악입니다. 이 사건을 주목한 것은, 공범이 많고 죄질도
불량하고, 주된 공소사실이 ‘조직적 성매매 강요’로, 요즘 대두되는 디지털 성범죄나 성착취 범죄와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성매매 여성이 대부분 청소년과 지적장애 여성으로 사회적 최약자 위치에 있기도 했고요.”
- 이런 유형의 사건을 판단하는 데는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청소년 성매매나 성범죄(카메라이용 촬영 등)의 경우 대부분 ‘자발적 외관’을 띱니다. 합의도 비교적 쉽게 되고요. 기존
양형 논리로 중한 형을 부과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동·청소년 성매매와 디지털 세대에 대한 자료 등을 참
고했습니다. 최근 성폭력범죄 관련 활동가들이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와 토의한 자료가 도움이 됐습니다. ‘순수한 자발적
성매매는 없다’고 표현한 이유는, 아동·청소년이나 지적장애 여성을 성매매에 유인·동원한 경우 피해자들이 호응했다 해
도, 강제나 그루밍·사회경제적 요인 등 외부의 힘이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서입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용어
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성범죄에서 이들 세대의 특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박주영은 판결문에서 “디지털 네이티브로 지칭되는 10대들의 생각과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얼핏 자발적으로 보이는
성매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디지털로 소통하고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으며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평판을 두
려워하는 청소년을 위협해 성매매에 나서게 한 범죄의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지적했다.
- 반성폭력 활동가들은 이번 판결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반면 법조계 일부에선 논란도 있는 걸로 압니다.
“사건에 치이고 시간이 부족해 양형 이유에 실은 내용을 충분히 숙고하지는 못했습니다. 논쟁의 측면도 많을 겁니다. 이
런 점을 모두 감안하고서라도 다소 과감하게 쓴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는 법원도 여성주의 시각에서 성 관련 사건을 바
라보는 움직임이 있음을 사회에 알릴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원에서 누군가는 선제적으로, 소수자의 지위에 머물
러 있는 여성의 입장을 전하는 스피커가 돼야 한다, 궁극적으로 가해자나 남성 중심 사회에 강력하게 경고해야 한다고
봤어요. 깊은 연구나 고민이 부족해 송구스럽고 걱정됩니다만, 위험을 경고하는 사이렌처럼, 이런 범죄의 맥락과 심각성
을 환기하는 촉발자 역할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시각이 여전히 온정적이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온정주의로 비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법정형 자체가 낮거나 ‘비동의 간
음’처럼 법의 사각지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입법의 영역이지요. 또 성범죄의 경우 법 해석이 어려운 지점이 매
우 많습니다. 역시 입법으로 해결하는 게 깔끔하지만, 해석으로 가능하다면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의 ‘위력’ 개념처럼
가능한 한 피해자 위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살인죄의 양형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인죄 피고인
에게 징역 18년을 선고했는데 강간죄에 20년을 선고할 수는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유사 사건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지요.
“지난주에 유사한 성범죄 사건을 5년 선고했는데, 그사이 법감정 변화가 있었고 재판부도 사안의 중대성을 새롭게 인식
했다고 갑자기 10년으로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 고민을 확장하면, 재판부 사이의 양형 편차로 이어집
니다. 옆 재판부나 다른 법원의 하급심 양형이 대개 3년인데, 성인지 감수성이 특별히 높다는 이유로 유독 내 재판부만
징역 10년을 선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 이른바 ‘진지한 반성’에 의한 형량 감경에 비판이 많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죄이고, 무엇이 진정한 용서인가…. 법정에서 짧은 재판으로 변별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결국 피해자
의 고통에 얼마나 감응하고 있는지 유심히 봐야 합니다. 피해자와의 합의도, 피해자가 아동이거나 지적장애 여성일 경우,
본인의 진의와 다른 합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합의액수가 아무리 크다 해도 흉악범죄를 저질러 놓고 돈으로 막으려는
건 아닌지 면밀히 파악해야 합니다.”
- ‘피해자다움’을 둘러싼 논란도 끊이지 않습니다.
“피해자다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성폭력을 당하고도 일상생활 유지
가 불가능할 만큼 충격을 받는 사람도 있고, 훨씬 중한 성범죄 피해를 보고도 정상적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량
화·객관화해서 판단한다는 건 무리입니다. 기존의 형사재판은 피고인 중심으로 설계된 제도인데요. 앞으로 피해자들이
형사절차에 더 많이 참여해 그들의 고통이 양형에 더 반영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 성범죄 양형을 강화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요.
“법률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입법하고, 양형기준을 강화해서 특정 재판부만의 유별난 양형이 아닌 점을 공식화해야 합
니다. 넓은 양형기준 내에서도 과감하게 무거운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관성적 해석의 고리를 누군가 선도적으로 끊는 선
례들이 쌓일 필요도 있고요.”
- 법관들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지적은 어떻게 봅니까.
“저를 포함한 대다수 판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안 읽지만, 특히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는 이가 몇 명이나 될지 모르
겠습니다. 저 역시 책(<어떤 양형 이유>)을 쓰면서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게 됐습니다. 그제야 페미니즘이 세상을 보는
근본적 시각에 대한 논쟁임을 알게 됐습니다. 무지해도 너무 무지했더군요. 제가 살았던 세상의 공용어가 남성어였음을
잘 몰랐던 거죠. 판사를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듣고 판단하는 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태껏 다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자각이 뼈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박주영은 지난해 펴낸 <어떤 양형 이유>에서 소년부 판사 시절 만난 ‘아이들’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오토바이 절
도로 온 14세 병철(이하 모두 가명), 차를 훔치다 온 15세 호준, 돈을 뺏다 온 16세 정숙, 성매매를 하다 온 18세 숙희….
소년부 판사로 일한 1년반 동안 그는 1500건 정도의 사건을 처리했다. 그중 60~70%는 집안 환경과 경제 사정이 좋지 않
은 아이들이었다.
- 불행한 환경의 청소년들이 범죄의 늪에 빠지는 악순환을 막으려면 무엇이 절실한가요.
“절대적 빈곤 문제를 가장 먼저 꺼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해 후 자살도, 가정폭력도, 아동학대도, 보이스피싱 가담도,
성매매도 결정적 원인에 가난이 있습니다. 소년범죄 역시 마찬가집니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면 상당수 범죄가 사라질 겁
니다. 가난한 부모가 잘 때립니다. 가난한 부모가 잘 죽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성매매에 나서고, 가난한 아이들이 성매
매를 강요합니다.”
- 소년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선을 넘은 범죄의 경우는 엄벌해야 하지만, 소년범 전반에 대해 엄벌 기조로 돌아서
선 안 됩니다. 엄벌주의는 성인들보다 현저하게 책임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실효성이 거의 없습니다. 소년범은 충동적이며, 군중심리에 잘 휩싸입니다. 형벌을 겁내서 범행을 멈출 만큼 이성적이지
않아요. 정말 한 마을이 나서야 겨우 아이 하나를 제대로 키웁니다. 성인범도 마찬가지지만, 사회적 안전망의 조기 가동
이 중요합니다. 가벼운 범행 단계에서의 적극적 개입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사회적 사랑을 아낌없이 마구 퍼부어야 합
니다.”
“대중의 비판은 숙명…판사가 어려운 건 법감정이나 여론에 휩쓸려서도 안 되기 때문”
“승패에 무관하게 당사자가 만족하는 ‘좋은 재판’은 ‘좋은 판사’가 한다”
“올바른 판단 내리지 못하는 법관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험하고 해로운 존재”
“끝까지 유연하게…1㎜라도 세상을 좋게 움직이는 데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박주영의 판결문이 각별히 주목받기 시작한 건 울산지법 재직 때다. 2014년 한 달 사이 3차례 사고가 발생해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목숨을 잃은 현대중공업과 그 하청업체 관계자들 사건이었다. 2015년 11월 선고공판에서 그는 읽어 내려
갔다.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 개별 피고인들 전부에게 예외없이 금고형과 징역형을 선택해 무겁게 처벌하는 이유는, 생
명은 계량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함에 있다.”
이 판결문을 쓰기 위해 그는 현장검증을 나갔다. 용접불꽃이 폭죽처럼 터지는 곳에서, 안전모를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 다녔다. “기록만 보고 머리로 고통을 상상해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 <어떤 양형 이유>에서 산업재해 사건의 법정형이 낮다고 비판했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까.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합니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산재예방,
즉 인명손실의 예방에 있지만 형벌, 특히 사업주 처벌은 정의의 영역에서 또한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재벌이 경제적 이익
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위법에 대한 책임은 하늘이 무너져도 져야 한다, 이게 바로 정의의 문제입니다. 물론 경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한 책임을 전부 경영진에게 묻는 것은 옳지 않겠지요. 하지만 단순한 경영판단이
아닌 불법의 영역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불법으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사람의 생명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최종 의
사결정권자까지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면책되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고 봅니다. 법인에도 상당한 징벌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요. ‘제조물책임법’이 도입될 당시 기업들이 망한다고 입법을 막으려고 난리도 아니었습
니다. 그러나 그 법 때문에 망했다는 기업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헌법은 ‘법 앞의 평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는 시민은 많지 않습니다.
“과거 시국사건 재판, 재벌에 대한 ‘3·5(징역 3년·집행유예 5년) 정찰제’ 판결 등 몇 가지 문제가 원죄로 작용해 사법부 불
신의 배경이 되어왔습니다. 잘못한 것이죠. 이른바 정무적 판단을 한 건데 그것은 사법 영역이 아닙니다. 사법제도적 측
면에선 소송구조 영역에서 예산을 더 확보해야 하고요. 범죄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서 이들을 경제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피고인을 엄하게 단죄하는 경우 남은 가족 문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법정구속할 때 ‘판사님, 제가 들어가면 우리 애들 죽습니다’라고 소리치면 마음이 정말 불편합니다.”
- 법관들을 향한 대중의 비판을, 법관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자기 욕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만 비난에 대처하는 자세는 다양합니다. 반성하자는 입장, 억울해하는
입장, 진영논리로 판사를 흔든다며 불편해하는 입장 등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유를 불문하고 머리 숙이고, 잘못한 게
있으면 반성하고, 억울한 지점이 있으면 비난 깊숙이 담긴 함의를 찾고, 정말 부당한 비난은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세간의 비난에 많이들 힘들어하지만, 이건 우리나라 법관의 숙명 아닌가 싶습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민주적 정당성이 없으니까요.”
지난해 말 박주영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법정에 선 청년들에게 “부디 잘 살아달라”며 선처하고 차비까지 건네
화제가 됐다. 관련 기사에는 칭찬 댓글이 많이 달렸다. ‘박주영 판사의 DNA를 복제해 모든 판사를 클론으로 대체하자’는
댓글도 끼어 있었다. 반면 박주영이 내린 다른 성범죄 판결 기사에는 비난성 댓글이 이어졌다.
- 두 판사가 동일인임을 몰랐을까요.
“저는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죠. 댓글 다신 분들이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우리가 익숙한 서사에선 영웅은 영웅이고, 나쁜
놈은 나쁜 놈이어야 하니까요. 판사가 어려운 건 무조건 법감정이나 여론에 휩쓸려선 안 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국민의
힘과 비난의 핵심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다면 설득해낼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는 한계는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까.
“직업법관의 정확한 판단과 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경우 우린 아무 의미 없
는 존재일 뿐 아니라, 위험하고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매일 저녁 욕을 한 바가지 먹더라도, 최선을 다해 판단하고
오해가 없도록 설명할 뿐, 국민을 향해 ‘당신들이 우릴 뽑은 것도 아니니 딴소리하지 말라’고 탓할 순 없습니다.”
‘양승태 사법농단’이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다. 관련 피고인들의 재판은 지연되고, 선고가 이뤄진 일부 인사들도 줄줄이
무죄를 받고 있다. 어떤 이는 변호사로 개업하고 또 다른 이는 ‘법관 연임 포기’를 통해 탄핵 가능성을 회피한다.
“(사법농단) 관련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나 법리적 판단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공정해야 할 뿐 아니라,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고 일선 법관들을 그렇게 독려하던 고위 법관들이, 그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대지 못하는 건 유감입니다. 재판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법리적 판단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동료 법관들과 법원 구성원, 국민들
께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법부의 미래는 반성과 사죄의 바로 그 지점에서 쌓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흉하게 잔해가 널려 있는 한 새 건물을 올릴 수 없습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주목할 만한 자료가 공개됐다. 2013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법관으로 임용된 변호사 중 13.1%가 로펌
업계 1위인 김앤장법률사무소 출신이라는 내용이다. 10대 로펌까지 넓힐 경우 그 비율은 46.3%에 이른다(조수진 국민의
힘 의원). 과거 사법연수원 수료 직후 판사로 임용되던 관행은 사라지고, 지금은 일정기간 법조 경력자 중에서 판사를 임
용하고 있다.
- 법조일원화가 ‘후관예우’(변호사 출신 법관이 재직했던 로펌에 유리한 대우를 하는 것) 통로로 변질되는 것 아닐까요.
“능력으로만 따지면 법관은 그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후관예우는 좀 지켜봐야겠지만, 우려에는 공감
합니다. 지금 대부분 법원은 연고재판부 배당을 금지하는데, 지금처럼 많은 경력법관이 들어오면 이걸 어떻게 다 무연고
재판부로 배당할지도 의문입니다.”
- 신규 임용 법관의 SKY(서울·고려·연세대) 쏠림도 여전합니다.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함양하는 측면에서 로스쿨 한 학
기를 사회봉사에 할당하는 식의 조치를 취하면 어떨까요.
“공감능력은 성장환경 등을 떠나 개인적 품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개인적 경험이 없으면 뭐가 문제인지
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처럼 될 수 있습니다. 프로 보노(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
서비스) 활동이 활발해지고, 퍼블릭 디펜더(공공 변호사)도 도입하면 좋겠습니다. 법관 선발 과정에서 이런 활동에 가점
을 많이 줘서 ‘스펙’ 위주 선발을 지양했으면 합니다. 김앤장의 똑똑한 변호사들은 재판만 하기엔 아까운 인재들입니다.
이분들은 국제통상이나 외국과의 분쟁, 특허 등 정말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필요한 곳에서 일하길 바랍니다. 재판은 저처럼
시골 작은 로펌 출신으로도 충분합니다.”
박주영은 ‘좋은 재판’을 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9월 ‘법원의날’에 대법원장 표창을 받았다.
“좋은 재판은 승패에 무관하게 당사자가 만족하는 재판이죠. 친절한 진행, 세심한 기회 제공, 정당한 결론과 설득력 있는
판결 등일 겁니다. 하지만 핵심요소를 한 가지만 들라면 ‘좋은 판사’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한다고 생
각합니다. 충분히 듣고, 신중히 판단하고, 공감하는 재판이 좋은 재판의 예가 될 수 있지만, 당장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신속하게 개입하는 재판이 더 좋은 재판일 겁니다. 나쁜 판사가 좋은 재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 남성 법조인은 사법연수원 수료 후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치는 게 관행이었다. ‘개천’ 출신인 박주영은 달랐다. 재
단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친 뒤 장학금을 놓쳤다. 입대 외엔 대안이 없었다. 사시 합격은 졸업 후
했다. 어떤 법관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자 군대 이야기를 꺼냈다.
“끝까지 유연한 판사가 되고 싶습니다. 군대 시절, 81㎜ 박격포 분대에 있었는데요. 박격포의 사각과 편각이 몇 ㎜만 차
이 나도 포탄이 떨어지는 위치가 수십m 이상 차이나는 걸 봤어요. 그 이후, 세상을 향하는 각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삶의
탄착지점 역시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거라 믿고 살았습니다. 정상궤도를 벗어나지 않으려 미세조정하며 살았습니다. 다만
처음에 잘못 겨냥했다 하더라도 계속 궤도를 수정하려는 유연한 자세가 있으면 되겠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살짝이
라도 새로운 걸 시도한 사람, 1㎜라도 좋은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데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박주영은 판결문 몇 장으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그럴수록 양형 이유를 상세히 쓰려 한다. 언젠가, 파묻
힌 판결을 들춰낼 그 누군가가 있으리라 믿으며.
■‘선출되지 않은 권력’ 법관 판결문 공개로 감시해야
법원과 법관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주권자는 이들을 직접 뽑을 수 없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하는지 감시할 수는
있다. 판결문을 통해서다. 헌법 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실은 다르다. 일반 시민이 판결문에 접근하는 길은 쉽지 않다. 항소·상고 등 불복 절차가 끝나 확정된 판결문은 대부분
법원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열람할 수 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비실명 처리’된 후 제공된다. 그러나 미확정 판결문
은 당사자 외에 공개되지 않는다. 법원도서관 특별열람실에 찾아가면 볼 수 있지만, 컴퓨터가 4대뿐이다. 하루 예약을
20명만 받는다. 출력이나 다운로드도 불가능하다.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사법 절차를 투명화하는 차원에서 판결문 공개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시민 의견도 찬성이 압도적이다. 2018년 5월 금태섭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데이터앤리서치에 의뢰해 1010명
을 대상으로 실시한 ‘법원 판결문 공개제도에 관한 대국민 인식도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0.8%가 판결문 공개에
찬성했다. 당사자 실명 공개에도 59.1%가 찬성을 나타냈다.
법관들의 입장은 상반된다. 2018년 4월 법원행정처가 법관 11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미확정 민사 판결문 공
개에는 70%가, 미확정 형사 판결문 공개에는 78.2%가 반대했다. 판결문 전면 공개에 찬성하는 한 판사는 “법관들이 책
임지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라며 “법관도 틀릴 수 있고 비판받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태섭 전 의원은 20대 국회에서 미확정 판결문을 공개하고, 개인정보 보호조치를 삭제하는 내용의 민사소송법·형사소
송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법안은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금 전 의원은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현재는 확정된 판결문
도 법인 이름까지 지운 채 공개된다”며 “그러다 보니 그 유명한 ‘땅콩 회항’ 사건 판결문에도 A그룹, B항공, C지점 식으
로 표시된다”고 비판했다. 또 “판결문 전면 공개가 이뤄지고 임의어 검색이 가능해지면, 전관 변호사 이름을 넣어 실명
검색을 하는 등 전관예우 대책도 강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법개혁에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지만, 판결문 공개
확대가 최우선”이라고 했다. 21대 국회에서는 이탄희 민주당 의원이 판결문 전면 공개를 담은 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 개
정안을 대표발의한 상태이다.
대법원은 지난 9월24일 사법행정자문회의를 열고, 관련법 개정 전이라도 미확정 판결문을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
다. 먼저 민사·행정·특허 사건의 미확정 판결문을 공개해 경과를 지켜본 뒤, 형사 사건의 미확정 판결문 공개 여부를 결정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추진 상황은 드러난 게 없다. 진준오 법원행정처 공보관은 “미확정 판결서의 공개를 위
해선 예산 확보, 시스템 개선 등 실무적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항을 준비하는 단계”라며 “현재 외부에 무엇
인가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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