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불공평하다. 빈곤층과 장애인에게 먼저 찾아오고, 더 치명적이다.
이들은 주로 저지대와 상수도 미보급지역, 상습 침수지역에 모여 산다. 노인과 어린이, 야외 노동자와 농민도 기후
위기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계층이다. 폭염으로 열지수가 높아지면 취약계층의 사망률이 올라간다. 실제로 서울에
거주하는 65세 이상의 고령층을 조사했더니 여름철 혹서기에 호흡기계 및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
한 것으로 나타났다.(보건사회연구 2014, 폭염으로 인한 기후변화 취약계층의 사망률 변화 분석)
기후위기의 몸통은 경제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2016년 국민안전처(현 행정안전부) 산하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발표한 ‘한 달간의 폭염지옥’ 가상 시나리오를 살펴
보자. 마침 시나리오의 배경은 올해 2020년이다.
1주차에는 때이른 무더위에 가뭄이 지속된다. 2주차에 첫 사망자가 발생하고, 3주차에는 수인성 전염병이 돈다.
동시에 온열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폭증한다. 불쾌지수로 인한 사건·사고도 급증한다. 4주차에는 우발적 살인이
늘고 온열 질환 사망자가 잇따른다. 아열대 기후에서 유행하던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대유행한다. 농업 등 1차산업
피해 확산으로 물가는 폭등하고 식수 부족으로 고통받는다. 말 그대로 한반도 전체가 폭염지옥에 갇힌다. 재난안전
연구원은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정책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재난안전연구원의 시나리오는 경고에 그치고 말았다. 지난해 발표된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2020’에서 한국의 기후
변화 대응점수는 전체 61위 가운데 58위를 기록했다. 보고서는 “한국은 온실가스 배출량과 에너지 사용 부문에서 어떤
진전도 보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이산화탄소 배출량 증가율 1위다. 온실가스 감
축은 실패했다. 2017년 기준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년보다 2.4% 증가한 7억914만 톤으로 집계됐다. 파리협정에 따라
2030년까지 5억3600만 톤으로 줄여야 하지만 대안을 찾지 못했다.
한국이 정체된 사이 국제사회는 답을 찾고 있다. 해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설득력 있는 대안은 마련했다. 바로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이다. 미국은 ‘그린 뉴딜’, 유럽은 ‘유러피언 그린딜(European Green Deal)’이라고 부른다.
그린 뉴딜은 온실가스 감축 구호가 아니다. 경제·산업 시스템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온실가스 감축 과정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불평등을 해소하는 개혁 정책이다.
그린 뉴딜은 기후위기의 몸통이 온실가스가 아니라 경제시스템에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캐나다 출신 저널리
스트인 나오미 클라인은 저서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지구온난화의 주역은 탄소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며
“우리는 왜곡된 경제시스템을 개혁해 세계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린 뉴딜은 환경운동가 사이에서 오가는 추상적 환경 담론이 아니다. 미국 최연소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등 민주당 하원의원 64명과 상원의원 9명이 제출한 ‘그린 뉴딜 결의안’에는 정의로운 전환을 통한 온실가스
배출 제로 달성과 재생에너지 100% 전력 생산, 미국 시민 모두를 위한 수백만 개의 좋은 일자리 창출과 경제적 번영
보장, 지속가능성을 위한 인프라와 산업투자 등의 내용이 담겼다.
올해 말 미국 대선을 앞두고 버니 샌더스와 조 바이든을 비롯한 민주당 후보들이 잇따라 그린 뉴딜 공약을 발표하면서
그린 뉴딜은 미국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그린 뉴딜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선라이즈 무브먼트를 비롯
한 청년 기후변화행동 그룹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미국 시민은 기후위기 대응 정책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2018년
조지메이슨대학 기후변화 커뮤니케이션센터와 예일 프로그램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원 92%와 보수당원 64%
가 그린 뉴딜에 지지의사를 표명했고, 무당파의 80%가 그린 뉴딜에 지지의사를 밝혔다. 정치적 성향과 무관 미국 시민
의 90% 이상은 기후변화 정책을 위한 협치가 필요하다는 뜻을 밝혔다.(eco America 2018)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한국 정부
유럽의 그린딜은 미국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그린딜에 합의한 유럽연합(EU·폴란드 제외)은 올해
온실가스 감축 관련한 입법 논의를 진행하고 구체적인 실행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그린딜에는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 0(제로) 달성, 환경친화적 상품·기술 기업 지원, 공정·포용적인 전환 전략이 담겼다.
그린 뉴딜이 국제사회 주요 의제로 떠오른 지금 한국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지난해 12월 정부가 발표한
‘2020년 경제정책방향’에서 기후 관련 대응 방안은 단 두 개에 불과하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개선과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한 범부처 이행 점검·평가 체계 구축이 전부다. 온실가스로 인해 발생하는 재난 비용과 피해
규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2월 5일 환경부가 공개한 ‘2050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LEDS)’ 검토안도 ‘구체성을 담보하지 못한 공허한 수준’에 그
친다. 정부는 이 검토안을 토대로 올해까지 LEDS를 확정해 유엔기후변화협약에 제출할 예정이다. LEDS에는 온실
가스 감축 목표량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담아야 한다.
LEDS 검토안은 205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7년 대비 40∼75% 감축하는 내용으로 5개의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넷제로 실행 방안은 담기지 않았다. 석탄발전과 내연기관차도 2050년까지 유지
하도록 설계했다.
정부는 기후위기를 아직까지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다른 분야와 기후 분야를 비교해보면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정부의 인식이 드러난다.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 당시 정부는 즉각적으로 위기 대응 시스템을 가동했다. 당시 일본 수출규제의 범위와 강도를
고려했을 때 위기로 불 수 없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정부는 한·일 경제 전쟁을 운운하며 한 달 만에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7조8000억원 투자, 관련 기업 세금 감면과 관세 인하, 화학물질 인허가 절차
단축 등 전방위적인 지원 방안이 담겼다. 추경을 통해 일본 수출규제 대응 예산 2732억원도 투입됐다. 지난해 기후변
화대응과 관련해 책정된 예산은 총 792억원(에너지 및 자원 572억원·환경개선 220억원)에 불과하다. “일본 수출 규제
사태를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위기’라고 인식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정부가 이 정도 규모의
예산을 그린 뉴딜을 위해 쏟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김병민·위기에 대응하는 한국의 자세·그린 뉴딜
한국 네트워크)
기후위기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은 지금처럼 국제사회로부터 ‘기후 악당’으로 낙인찍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
사회가 기후위기 대응 체제로 돌아서면 한국은 경제산업 분야에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예컨대 EU의 그린딜 계획이
2021년에 시행되면 당장 한국은 ‘탄소 국경세(무역 대상이 되는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토대로
새로운 관세)’를 물게 된다. 국내 석유화학·철강·자동차 수출업체의 비용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EU는 한국의 전체
수출량의 8.5%(2018년 기준)를 차지하는 교역 대상이다. 국내 환경오염 방지뿐만 아니라 수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서라도 저탄소 공정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자동차 산업은 2025년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휘발유·
경유차 판매금지에 들어가는 유럽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기차 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
거대 정당 총선 공약에도 없어
이런 상황에서 그린 뉴딜은 한국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데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그린 뉴딜로 바뀌는 국제
사회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동시에 새 일자리를 만들고 성장 동력을 끌어낼 수 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가
공개한 스탠퍼드·UC버클리 대학 공동연구팀의 ‘한국에서 그린 뉴딜 에너지 정책이 전력공급 안정화와 비용, 일자리,
건강, 기후에 미칠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이 2050년까지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할 경우 144만 개 이상의 일자
리가 늘어날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도 그린 뉴딜의 경제 효과를 분석한 바 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청정에너지 경제로의 전환은 청정에너지 생산과 에너지 효율, 환경 관리의 세 가지 주요 산업 분야 전반에 걸쳐
320개의 고유한 직종을 생성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른바 ‘녹색 일자리’의 시간당 임금은 전국 평균 임금보다 18%
이상 높다고 분석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린 뉴딜은 환경보다 경제 비중이 높은 정책이다. 총선 공약으로 그린 뉴딜을 들고 나온 정의당
이 ‘그린 뉴딜 경제전략’으로 네이밍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의당은 재생에너지 전환과 탈탄소 인프라 구축, 200만
호 그린 리모델링, 전기자동차 시장 활성화로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그린 뉴딜을 총선 1호 공약 내세운 녹색
당도 탈탄소 경제로의 대전환을 강조한다. 이유진 녹색당 선거대책본부장은 “경제 전환을 추진하는 한편 이 과정에서
밀려나는 이들이 생겨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당과 녹색당은 이번 총선을 ‘기후위기’ 선거로 만들자는 입장이지만 주류 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의
입장은 미온적이다. 그린 뉴딜은 탄소세 도입과 전기요금 현실화가 뒤따르는 만큼 당장 표를 얻는 데 불리한 이슈이
기 때문이다.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은 지난해 3월 ‘한국형 그린 뉴딜 제안’ 보고서를 냈지만 공약 발표는 뒤로 밀리고 있다.
이에대해 민주당 관계자는 “그린 뉴딜 공약은 아직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미래통합당은 앞서 자유한국당 시절 탈원
전 정책 폐기를 통한 전기요금 인하를 총선 1호 공약으로 발표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는 정반대 노선이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은 “그린 뉴딜은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다툴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생존의 길”이라며 “절체절명
의 사안이 표심 잡기에 밀리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