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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참가 반대" 한일관계 꼬이게 만든 영국의 궤변
by. 김종성 입력 2020.02.16. 20:18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952년 2월 15일 제1차 한일회담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한국의 보다 신속한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는 한일관계다.
이 관계로 인해 한국은 독도 영유권이나 어업권, 교과서 문제나 과거사 청산 등에 상당한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다.
다른 사안에 쏟아야 할 자원까지 투입하게 만들어 한국 사회의 역량을 소모시키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식민지배 때문이지만, 한일회담 실패도 한 가지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양국간 현안을 해결
하고자 한일회담을 열었지만, 한국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한국은 과거사 문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열린 것은 1951년 10월 20일이고 이에 따라 본회담이 열린 것은 이듬해 이맘때인 1952년
2월 15일이다. 이 회담은 박정희 군사정권 때인 1961년 10월 20일의 제6차 회담으로 이어지고, 1965년 6월 22일의 한
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체결로 연결됐다.
한일회담은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형식상 마무리됐다. 하지만 실질적 마무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점은 양국이 오늘
날까지도 그 옛날의 한일회담 의제들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된 것은 한일기본조약 체결은
물론이고 그 전 단계인 한일회담에도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파렴치한 고자세
▲ 부대원 격려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일 요코스카 해상자위대 기지에서 열린 호위함 다카나미
환송 행사에서 박수로 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일회담이 성과를 낳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일본의 파렴치한 고자세다. 일본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고개를 숙이고
나온 게 아니라, '식민본국'의 자세로 어깨에 힘을 주고 나왔다. 이것이 회담의 생산성을 떨어트린 원인 중 하나였다.
그 같은 일본의 태도는 이른바 '역청구권' 주장으로 여실히 표출됐다. 일본은 35년간의 착취에 대한 한국의 청구권을
논의해야 할 자리에서, 엉뚱하게도 자국의 청구권을 거론했다. 1945년 패망으로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갖고 나가지
못한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1952년 4월 7일자 <경향신문> '한일회담 위기에... 일(日)측 재한 재산권 주장'이란 기사는 대일 강화조약인 샌프란시
스코 강화조약의 효력 발생 전에 한일회담을 끝내고 국교 정상화를 마무리하기 힘들게 됐다면서 "방금 진행 중의(지
금 진행 중인) 재산청구권 문제 토의에 있어서 일본측은 태도를 돌변하여 한국 내에 있는 일본인 사유재산에 대한 청
구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 뒤 이렇게 분노를 표시했다.
"일본 측이 청구권을 주장하고 있는 한국 내의 일본인 사유재산이라 함은 그들이 폭력으로써 우리 국토를 장기간 점유
하고 협박·공갈·체포·투옥·학살 등 야만적인 수단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자원을 착취하고 우리 동포들을 노예와 같이
혹사함으로써 만들어진 피땀의 결정일진대 ······."
일본이 미안해 하면서 회담을 해도 시원찮을 텐데, 도리어 피해자들을 분노케 했으니 회담이 잘될 리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양국 간 현안들이 대충 봉합돼 버렸다. 이 때문에 2020년이 된 지금까지도
한일관계는 계속해서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일본이 경제보복을 가하자, 한국은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를 검토했다.
하지만 결국 경제보복만 남고, 지소미아 파기는 흐지부지됐다. 한일관계가 이처럼 항상 꼬이는 것은 68년 전 제1차
한일회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결과인 것이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만나러 나오는 태도'가 아니라 '식민본국이 옛 식민지를 만나러 나오는
태도'로 임했다. 1953년 10월 6일 제3차 회담에서 구보다 간이치로 수석대표의 망언이 그런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일본은 36년간 한국에 많은 이익을 주었다"며 "만약 일본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
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는 유명한 망언을 남겼다.
적반하장 같은 일본의 태도를 감내하면서도 한국은 한일회담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결정적 원인은
한국의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불참이다. 이것이 원인이 돼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협상장이 아닌 한
일회담 협상장이라는 별도의 무대에서 일본을 상대해야 했고, 이로 인해 '가해자 일본'이 아닌 '옛 식민본국 일본'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 때문에 한국은 '절반은 패배한 상태'에서 한일회담을 시작해야 했다. 한국은 호통을 치기는커녕, 도리어 애매하고
억울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국이 오래도록 한·일 과거사를 청산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영국의 책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은 광복군을 앞세워 항일전쟁에 참가했다. 그런데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는 항일전쟁을 수행한 주체가 임시정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폴란드도 한국처럼 임시정부 체제 하에 있다가 1945년에 독립했다. 그렇지만 폴란드는 강화회의에 참가했다. 18세기
말부터 영국 식민지였던 스리랑카는 한국보다 3년 늦은 1948년에 독립했다. 그나마도 완전 독립이 아니었다. 영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한 것이었다. 완전 독립은 1972년에 이뤄졌다. 그렇지만 스리랑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가
했다.
이 회의에 참가한 48개국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 것이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배로 피해를 입었고, 임시정부를 세우고 항일전쟁을 벌였는데도 참가하지 못했으니 불공평이란 단어를 떠올
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미국이 최종 결정권자였으니,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 것은 미국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더해, 미국의 결정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나라의 책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도 한국의 참가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일본 이상으로 한국을 방해한 나라가 있다.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
을 체결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특수 권익'을 승인해주고 일본의 한국 강점을 도와준 영국이 바로 그 나라다. 영국은
중국 공산당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참가는 찬성하면서도 한국의 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이 같은 영국의 태도는,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의 부관인 존 앨리슨이 한국과 중국의 회의 참가 문제를 놓고
1951년 3월 21일 런던에서 로버트 스코트 영국 외무성 차관과 협의했을 때도 나타났다.
1990년에 정성화 명지대 교수가 <인문과학연구논총> 제7권에 기고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한국·미국·일본의
외교정책의 고찰'에 따르면, 로버트 스코트 영국 차관은 "중국이 평화조약에 중국측 대표로 참석하여야 한다"면서도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식민지로서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했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한국의 참가
를 반대했다.
영국 정부는 한국인들이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수행한 사실을 감안하지 않았다. 한국 광복군이 영국군과
함께 인도·미얀마에서 싸웠던 것도 기억해내지 않았다. 영국은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강제징용돼 억지로 끌려간 것을
놓고 '한국인들이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는 궤변을 내놓았다.
영국이 한국의 참가를 반대한 또 다른 이유는 한국전쟁과 관련돼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 6천
병력을 파견한 영국의 이해관계가 한국의 강화회의 참가 문제에 영향을 미쳤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은 영국의 애틀리가 주도하고 있는 노동당 정부와 외교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특히 중공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후 영국은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을 적극 주장함에 따라 한국과 영국의 관계는 순탄하지 못하였다."
민족을 분단시킨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휴전협상을 반대했다. 이것이 영국의 반감을 사는 요인이 됐다.
이에 더해 영국의 소련 눈치 보기도 한몫을 했다. 위 논문은 "소련이 외교적 승인을 부여하지 아니한 대한민국이 평화
조약에 참가하는 것은 소련에게 평화조약을 방해할 중요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으로 판단한 영국은 대일강화조약의
한국의 참석을 반대하고, 미국도 이러한 영국의 논리를 받아들여 궁극적으로 한국의 참가를 반대"했다고 말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빠진 결과
▲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준공식 참석한 아베 총리 ⓒ 연합뉴스/EPA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의무는 제2조에 규정돼 있다. 그 제2조의 제1항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
하고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이 해야 할 일의 첫 번째 사항으로 한일관계 해결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핵심 내용이
한일관계에 관한 것인데도 정작 한국이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전승국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여하고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한일회담이라는 별도의 무대로 옮겨가야 했고, 이로 인해 일본 대표들의 망언을 들어가며 회담을 해야 했다.
승전국 위치에서 일본을 내려다보고 호통치며 했어야 할 일을, '옛 식민지' 위치에서 일본의 눈치를 보고 애매한 소
리를 들어가며 하게 됐던 것이다.
강화조약 제2조 제1항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서약했던 일본이 제1차 한일회담에서 역청
구권을 거론한 것은 한국을 얼마나 무시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미국이 끼어드는 것도 모자라
영국까지 끼어든 탓에 이런 결과가 생겨났던 것이다.
제3자들이 부당하게 개입해 만들어놓은 한일관계의 틀을 한국은 아직도 깨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남북관계뿐 아니라
한일관계에서도 여전히 제3자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가하자 미국 워싱턴에 가서 도움을 호소했고,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미국의 압력을 받다가 지소미아 파기만 보류하고 경제보복은 철회시키지 못했다. 자기 일
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해온 관성이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경제보복과 강제징용·위안부 문제 같은 한일관계 현안들을 풀려면, 일본에 대해 원칙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제3자의 불필요하고 부당한 개입을 차단하는 것도 한일관계를 푸는 순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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