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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심장'으로 살아온 89년, 모든 날이 뜨거웠다

인주백작 2019. 12. 23. 13:27

한겨레

서울의 '심장'으로 살아온 89년, 모든 날이 뜨거웠다

by. 노형석 입력 2019.12.22. 18:06수정 2019.12.22. 20:16


[문화유산 보존되는 당인리발전소 내부 취재기]


마포 한강변 자리잡은 거대 굴뚝

수십년간 뜨거운 증기 내뿜으며

서울·수도권 등서 쓴 전기 만들어


"거대한 산업유산의 알맹이 남아"

압도적 위용의 스팀터빈 발전기

다닥다닥 붙은 15개 측정 계기판

육중한 콘덴서·파이프·탱크 드럼..

기계 우주 속 탐험하는 듯 느껴져


문체부, 복합문화센터 추진하며

4·5호기 중 5호기 시설만 보존키로

수많은 일화들, 재탄생 방식 관심


1982년 1월 당인리 발전소. 연합뉴스


지난 세기 ‘그곳’은 서울에서 가장 뜨겁고 저릿저릿한 공간이었다.

인디밴드와 예술가들이 활보하는 서울 홍대 앞에서 불과 1㎞ 떨어진 마포구 한강변의 ‘그곳’엔 마그마를 방불케

하는 500℃ 넘는 열 기운을 80년 이상 뿜어낸 큰 탑과 큰 집이 있었다.

 

거대한 마천루 굴뚝과 복잡한 파이프 덩어리, 보일러 탑으로 구성된 낡은 발전소 건물. 2년 전까지 이 한강변

발전소는 증기로 내부가 펄펄 끓던 보일러 탑을 전면 가동하며 시민들에게 전기와 열을 주었다. 60m가 넘는

탑과 굴뚝은 40년 이상 군림했던 서울 한강변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당인리발전소’로 친숙한 산업문화유산인 서울 마포구 토정로 서울화력발전소의 내력이다.

한국 최초의 화력발전소이자 한국 전력생산의 기념비적 상징물이라는 명예로운 수식어가 뒤따르는 시설이다.

 

이 발전소에서 거대한 증기로 전기를 만드는 과정은 움직이는 설치작품을 만드는 창작에 가까웠다.

보일러 탑 아래로 휙휙 뚫린 배관 파이프가 설비와 정수시설 여기저기를 돌고 돌아 터빈 발전기로 올라갔다 내려

갔다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순환한 뜨거운 물과 증기가 1㎝당 수백㎏의 고강도 압력이 되어 터빈의 날개와 발전

기 코일을 돌린다. 그 결실로 뿜어져 나온 수십만㎾의 전류는 변전소를 통과하면서 가정과 공장에서 쓸 수 있도록

전압을 낮춰 갈무리됐다. 발전소는 갈무리된 전력을 서울과 수도권 각지로 나눠줬다. 석탄으로 시작해 벙커시유,

그러다 미세먼지와 공해로 비난이 일자 액화천연가스(LNG)를 흡수하면서 증기와 전기를 쏟아낸 그 세월이 어언

89년이다.


내년에 철거되는 옛 당인리발전소 4호기 발전기의 정면 모습으로, 제조사인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의 상표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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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덴서(복수기) 앞에서 스케치 중인 김정헌 작가


미술판 작가들은 사연 많은 당인리발전소를 놓치지 않았다.

1957년 사진가 임응식은 한껏 증기를 뿜고 있는 발전소 언덕 아래서 우물에서 물을 긷는 서민들과 눈 덮인 언덕을

목가적으로 포착했다. 한국화 거장 고암 이응로는 50년대 어느 날 증기 뿜는 당인리발전소의 강변 풍경을 화선지

에 붓질한 작품으로 남겼다.

 

<한겨레>는 지난 9월23일과 12월12일 사연 많은 옛 당인리발전소 내부를 언론사로는 처음 들어가 취재했다.

내년 복합문화시설 공사로 내·외부가 바뀌게 될 산업문화유산의 면면을 기록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름은 친숙하

지만 내부 기계들은 낯설기만 한 곳, 4호기와 5호기로 나뉜 터빈을 비롯해 급수기·복수기 등 거대한 발전소용 기계

장치들, 파이프 배관, 상부의 보일러 탑 등을 일일이 살폈다. 국내 미술판에서 기계비평의 영역을 개척해온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와 호기심 왕성한 원로화가 김정헌씨가 답사에 동행했다. 두어 달 간격을 두고 펼쳐진 발전소 답사

는 기계 우주, 전기 우주를 탐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일 중요한 건 국내 대부분의 산업유산은 껍데기인데, 당인리는 산업유산의 알맹이가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자금·기술 지원으로 1971년 설치된 4호기 터빈.


답사단의 길잡이가 돼준 이영준 교수는 이 시설의 보존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건축가

조민석씨와 함께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인 발전소 시설은 보일러 탑이 각각 달린 발전소 4호기

와 5호기다. 4·5호기는 2017년 전력생산 가동이 중단됐고 올해 3월엔 난방열 생산도 끝났다. 중간 설계를 거쳐 내년

하반기 5호기는 전망 시설을 붙여 존치하고, 4호기는 외부 골조만 남긴 채 뜯어내 복합문화센터로 바꾸는 개장 공

사를 2022년까지 진행한다.


특히 5호기는 발전기와 보일러 탑, 냉각수 파이프, 복수기, 탈기기 등 여러 대형 기기들과 배선 파이프가 들어찬 공

간을 그대로 보존한다. 원래 주차장으로 쓰려다 미술계와 건축계의 지적에 따라 국내 최초로 보존된 대형 산업문화

유산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달 13일까지 문화역서울 284에서 국내 처음 전기 문화사를 주제로 연 ‘전기 우주’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5호기와 4호기를 잇달아 둘러봤다. 핵심은 길쭉한 베이지색 관 모양의 거대한 터빈과 발전기다. 길이는 30m가량. 천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몸체가 밝게 빛났다. 4·5호기는 증기의 힘으로 터빈을 돌리는 스팀 터빈 발전기로 기술이

척박하던 1960년대 말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왔다.


제조사는 전범기업인 일본 미쓰비시사와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사다. 보일러에서 배관 파이프를

통해 초고압 초고온이 된 증기가 들어오면 터빈 내부의 날개(블레이드)가 돌면서 전기가 만들어진다. 5호기 미쓰비시

터빈은 무게가 200톤이 넘는 초대형 설비다. 68년 인천항에 들어온 뒤 군사작전을 하듯 두 달 남짓 이송 작전을 펼친

일화가 전해진다. 70년대 4호기 앞에서는 이 기기에 자부심을 가진 관리직원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5호기 보일러 탑 상부에 있는 구 모양의 고압 증기 저장시설 ‘드럼’.


두 발전기 모두 뒷면엔 무궁화가 새겨진, 특정 기간 무고장 운전을 기념하는 표지가 훈장처럼 붙어 있다.

4호기의 무고장 운전 기념 표지에는 ‘트립 리셋 레버’라고 해 비상 상황에 조작 가능한 수동 조종 장치가 있다. 베어링

오일, 거버너 오일, 저압터빈 오일, 압력계 등 열다섯 종류의 계기판이 다닥다닥 조밀하게 붙어 있다. 당시 이 기기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국가 시책 사업인 전력생산에 얼마나 사활을 걸었는지, 얼마나 고장에 민감했는지, 얼마나 무고장

상태 유지를 위해 긴장했는지를 헤아릴 수 있다.


작업자 주의사항 안내판에는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절대 작업하지 말 것’이란 내용도 보였다. 계기판이 밀집한

컨트롤러 판 뒤 쪽엔 은색 스팀파이프들이 서로 몸체를 꽉 붙인 채 안쪽으로 쭉쭉 뻗어 들어간 모습을 볼 수 있다. “주

위 주택가나 아파트에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열을 보내기 위한 시설”이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대형 설비에서 새롭게

모으고 발생시킨 에너지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장치였다.


눈길은 옆으로 혈관처럼 퍼져나간 파이프 배선과 여러 접속시설, 펌프 등으로 옮겨간다. 지하 쪽으로 내려가서는 4호

발전기의 자식과 같은, 증기와 물의 순환 동력을 제공하는 새끼 터빈 동체를 발견하기도 했다.

 

상부 보일러와 터빈, 복수기 등을 이어주는 증기파이프가 지나가는 지하배선 공간.


뒤이어 철벽처럼 눈을 가로막는 기기가 다가왔다. ‘콘덴서’ 혹은 ‘복수기’라고 하는 거대한 벽 모양의 특수 설비였다.

격자처럼 4개의 구획을 지어놓고 각각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홀문을 달아놓았는데, 증기를 저장해 다시 물로 바꿔

순환시키는 장치다. 가로 10m, 세로 5m를 훌쩍 넘는 거대한 덩치에 정연하게 사각진 모양새가 위압감을 준다.


김정헌 작가는 육중한 설치작품 같은 콘덴서를 보자마자 바로 드로잉북을 꺼내서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특히 콘덴서

옆에 굽은 곡면으로 설치된 대형 2단 복수 펌프와 어울린 지하 기계설비는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라운 위용을 자랑

했다. 김 작가는 “이게 정말 압권이다. 엄청난 괴물을 어딘가 숨겨놓은 느낌이 설비의 크기나 모양에서 직관적으로 전

해진다”고 감탄하며 열심히 연필을 놀렸다.

 

5호기 첨탑 보일러실로 기어 올라갔다. 꼭대기에 오르자 이 부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명품 설비를 만났다.

뜨거운 물과 증기를 상층부에 보관하는 동그란 탱크 드럼이었다. 거대한 철제 원형 덩어리인데, 표면에 붙인 단열재

들이 열기 때문에 녹아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발전 과정에서 나온 고온·고압 증기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물

같았다.

 

증기가 들어오는 자루 같은 배관부가 위에 붙은 5호기.


보일러 탑 주변의 난간 지지대를 걸으며 지난달 완공된 세계 최초의 지하 화력발전소인 바로 옆 10층짜리 열복합발

전소와 주변 지상 공원, 상수동·홍대 부근 주택가와 거리 등을 본다. 곧 철거돼 문화복합시설이 들어설 4호기보다

현대식 빌딩처럼 커튼 월 디자인을 한껏 살려 지은 열병합발전소가 더 문화공간처럼 보이는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국내 전력 발전사의 핵심 유산으로 반백년 역사를 지닌 4호기가 사실상 고철로 처분된다는 건 안타깝다.


문체부는 4·5호기 시설을 한국중부발전으로부터 기부채납 형식으로 이양받아 내년 연말께부터 문화공간 공사에 들어

간다. 완공 목표 시점은 2022년. 문체부와 설계자 조민석 건축가가 5호기를 어떤 방식과 얼개로 보존할지, 껍데기만

남게 될 4호기 공간은 문화시설로 어떻게 재활용할지 관심이 쏠린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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