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동네 뒷산서 부모님 유골을 마주했을 때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20-11-19 09:44:45 수정 2020-11-19 09:44:45
한국전쟁 대전 골령골 민간인 학살 유해, 시민들 힘으로 70년 만에 모습 드러내
끌려가실 때 걸음마 배우던 어린 자식
반백 년을 훌쩍 넘어 오매불망 그리던 아버님 찾아왔건만
흔적 없는 학살 현장 기막힌 현실 앞에 힘없이 주저앉네
하늘이여 땅이여 거기 누구
내 아버님 가실 적에 본 사람 없소
―전숙자 대전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장,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중 ‘골령골에서’ 일부
(전 씨는 2001년 5월 2일 골령골을 처음 찾던 날 이 시를 썼다)
전숙자(73) 씨는 70년째 상(喪)중이다. 아버지 전재흥 씨의 유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최대 7
천 명의 민간인이 집단 학살된 ‘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 희생자다. 가해자로 지목된 국가의 방관에 유해발굴은 더디기만
했다. “썩는지 삭는지, 농부들 밭갈이에 몇십 번을 부서졌나/살아서 결박이요 죽어서 해해년년/뼈 부서지는 것은 무슨 죄
목인가/결박을 풀어야 하늘이든 지옥이든 갈 것 아니오”(시 ‘나는 상중이오’)
대전 골령골 제1 학살지에서 발굴된 유해ⓒ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전 씨의 옆을 지킨 건 시민들이었다.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동구청
과 공동주최로 지난 9월 22일 개토식부터 오는 20일 안치식까지 42일간의 골령골(현재 동구 낭월동 13번지) 유해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2010년 활동을 종료한 뒤 이명박 정
부에서 멈춰 서자, 공동조사단은 2014년 경남 진주를 시작으로 이번까지 총 11곳의 유해를 발굴했다.
지난 12일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을 찾았다. 시민참여형으로 진행돼 직접 발굴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골령골은 약
1km에 걸친 8개 구역에서 학살이 벌어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린다. 이번 작업은 대량 학살지로 알려진 제1 학
살지가 중심이다. 작업 후반부인 만큼 여러 명의 유골이 마구 뒤섞인 채 흙 위로 드러나 있었다. 전 씨는 “모두가 제 아버
지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남침’에 가려진 한국전쟁의 또 다른 모습이 여기 있었다.
유해 발굴 작업 중인 대전 골령골 제1 학살지ⓒ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여러 명의 유골이 마구 뒤섞여있다. 처음 발굴 당시 유골이 산처럼 쌓여있어 참혹했다고 전숙자 회장은 전했다. 사진은
한 차례 유골을 수습한 뒤 아래층에서 발견된 유골들이다.ⓒ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부서진 두개골
치아가 가지런한 턱뼈
70년 만에 드러난 유골들
넓이 14m 길이 20m의 구덩이를 덮어뒀던 파란 천을 벗겨내면서 작업이 시작됐다. 4m 깊이 속 유해들 위로 젖은 신문지
가 눈에 띈다. 밤새 땅에서 올라온 물기를 머금었다. 습기가 있으면 뼈가 쉽게 으스러지기 때문에 신문을 걷어내고 아침
햇볕으로 말리는 동안, 발굴단을 총괄 진행하는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이 조회를 진행했다. “마지막 부분인 a
구역을 작업합니다. 9차 시기 34일 차 발굴 시작합니다”
흙에 묻혀있는 유골을 노출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원형대로 수습할 수 있도록, 얇은 막대기로 유골 주변 흙을 파고 붓으
로 털어냈다. 주로 머리, 허벅지, 골반, 팔 등 크고 두꺼운 뼈들이 발견된다. 치아가 고스란히 남은 턱뼈를 보니 생전 모습
이 연상됐다. 노출 과정에서 웅크린 사람의 유해가 온전히 드러나기도 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노출을 담당한 김태인
씨는 “뼈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유골 그대로 노출하면 당시 상황을 재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12일 발굴 과정에서 웅크린 한 사람의 유해가 온전히 노출됐다.ⓒ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웅크린 사람의 유해를 노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다른 한쪽에선 흙을 걷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유골이 발견된 주변의 땅을 파면 또 유골이 발견된다. 그때까지 ‘인간
굴삭기’들이 호미로 흙을 파내면 ‘인간 컨베이어 벨트’가 발밑의 유골들을 피해가며 반대편으로 흙을 날랐다. “만리장성
을 이렇게 쌓았을 것”이라는 농담도 오고 갔지만, 이날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건설 노동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고된 작
업이었다. 흙을 마구 퍼내다가도 유골이 발견되면 막대기와 붓을 들고 노출 작업을 시작했다.
발굴장에서 수습된 유해는 세척장으로 모셔진다. 부위별로 분류된 유골을 아세톤에 6시간가량 담갔다가 이물질을 닦아
낸다. 이후 건조 과정에서 아세톤과 함께 수분이 날아가 유골을 더 온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독한 아세톤이 눈과 코를
찌르는 것쯤은 괜찮다며 윤은정 씨는 “세척 과정에서 유해가 상하는 것이 가장 속상하다”라고 말했다. 이후 발굴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허벅지 뼈를 기준으로 수습자 수를 세고, 연령대와 성별 등을 감식한다.
'인간 굴삭기'와 '인간 컨베이어 벨트'의 모습ⓒ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대전 골령골ⓒ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빨갱이를 죽여라”
유해발굴로 확인된 그 날의 진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골령골에서 학살된 이들은 1950년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국민보도연맹원들
과 제주 4.3사건·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정치·사상범, 징역 10년형 이상 일반사범 등이다. 사법 절차 없이 군과 경찰 등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경까지 세 차례 걸쳐, 최소 1천800여 명 최대 7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미국도 이 학살을 인지했던 것으로 진화위는 보고 있다.
유해발굴을 통해 증언과 문서로 전해진 학살의 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박선주 단장은 이번 발굴지에서 “2차 학살이 일
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7월 3일경부터 5일경까지 벌어진 2차 학살은 본격적인 대규모 학살이 시작된 때로, 형무소
재소자 1천8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박 단장은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된 1차 학살 땐 기둥에 묶어 총살한 다음 화장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이번 발굴에서 불에 탄 유골 등 관련 증거가 안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수갑, 흰 단추, 고무신 등 형무소 재소자의 유품으로도 시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 단장은 “허리띠, 시계 등 개인 유품과
총천연색 단추가 발견됐던 다른 곳에 비해, 제1 학살지에선 수갑 등 교정 도구, 흰 단추와 일정 크기의 고무신만 나왔다.
집단으로 있던 사람들이 끌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2007년 발굴된 제5 학살지의 경우 생필품 등 유
류품이 발견된 것으로 봐 보도연맹원이 희생된 1차 학살 장소로 추정된다.
“경찰과 헌병대가 재소자의 등을 밟고 뒷머리에 총을 쐈다. 시신을 거꾸로 쑤셔 넣고 큰 돌로 눌러버렸다”라는 증언이 입
증되기도 했다. 군과 경찰이 사용하던 M1·카빈·권총 탄피와 총알구멍이 뚫린 뒷머리뼈, 제각각 향해 있는 두개골과 다리
뼈, 유골 위 큰 돌들 등이 그 증거다. 누런 겉흙을 걷어내고 검은 흙이 나오면서 불과 30cm 아래서 유해가 발견됐고, 아
래로 계속 유해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시신들을 겹겹이 쌓아 대충 묻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골과 함께 흰 단추 등 유품들이 발견됐다.ⓒ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유품으로 발견된 고무신ⓒ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국군이 사용하던 M1 소총 탄피.ⓒ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이번 발굴의 큰 성과로 박 단장은 ‘구덩이 세 줄기’를 확인한 점을 꼽았다. 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산자락을 따라 휘어지는
모양으로 길게 뻗은 세 줄기 이상의 구덩이에 유해가 매장됐다. 박 단장은 “나란히 유해가 나오는 정형성이 세 군데에서
발견됐다”라고 설명했다. 박 단장은 구덩이 위치가 영국 <데일리 워커> 앨런 위닝턴 기자가 학살 직후 골령골을 촬영한
사진 속 산세, 봉우리 모양 등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도 확인했다.
연좌제에 아픔 감췄던 유족들
유해 보자 “아버지” 목 놓아 울어
발굴현장에서 만난 전숙자 회장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아버지는 좌익운동을 한 동생의 월북을 도왔
다는 이유로 1951년 3월 4일 골령골에서 24살 나이에 총살됐다.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전국을 헤맨 그는 2010년에야 민
간인이던 아버지가 군 법정에서 ‘이장 살해’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판결문을 확인하고 재심을 통해 2013년 무죄
를 받아냈다. 재판부는 62년 만에 무죄를 선고하며 “어떠한 위로의 말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골을 보면 가슴이 찢어져. 죄가 있어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생각이 다르다고 다 잡아 죽인 거야. 독일 나치도 이렇게
잔인하게는 안 죽였어. 이렇게 잔인한 인간들이 어딨어. 내가 73살인데 유족 중에선 막내야. 1년에 몇 분씩 저세상 가시
는데, 한 못 풀어드리면 그분들 눈 못 감고 돌아가셔. 지금도 억울한 건 죄 없는 민간인들은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는데,
그때 총질한 놈들은 현충원에 누웠으니 유족들 한이 어떻게 풀어져”
골령골에서 발견된 두개골ⓒ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수습돼 세척 작업을 마친 두개골ⓒ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유해발굴은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이다. 박선주 단장은 “빨갱이 굴레를 쓴 죽은 영혼과 유족들을
우리 사회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의례적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안경호 국장은 “부모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인도적 절박함이 가장 크다”라고 말했다. 발굴팀 김태인 씨는 “유족들은 70년 전 일을 수백
번 말했을 텐데, 항상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기억은 현재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팀의 박정순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사무국장은 “유족들이 발굴현장에서 대성통곡하는 걸 지켜보며 먼일처럼 느껴졌
던 전쟁의 아픔에 공감하게 됐다. 그동안 집회에서 만났던 산재 피해자나 국가폭력 피해자의 아픔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빨갱이로 낙인찍힐까 봐) 평생 아픔을 감추고 산 유족들이 유골을 마주하고서야 목놓아 아버지를 부르더라”라고 말했
다. 중국인 유학생 펭보 씨는 “발굴 작업이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기억의 시작은 사실관계 확인”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등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화해위원회가 다음 달 재출범을 앞두고 있다. 10년 만이
다. 진화위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던 안경호 국장은 이번 재출범 토대가 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
법) 통과를 위해 10년간 피해자들과 발품을 팔았다. 최근 진화위 재출범 준비로도 바쁜 안 국장은 “천신만고 끝에 출범한
2기다. 각별하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총괄 담당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
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그동안 과거사법이 제자리걸음이었던 이유는 ‘진영논리’ 때문이라고 안 국장은 비판했다. “국군·검찰·경찰·국정원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피해자들이 있다. 대립과 갈등을 말하며 피해자에게 그만 잊고 화해하자는 게 인권 국가인가. 국
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가 국민을 죽였다면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은 과거청산 문제를 정치화
시키기 위해 좌우 이념을 들이밀었다. 10년간 과거사법이 통과 안 된 이유는 진영논리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되지 않았는데 진영논리에 빠져선 안 된다고 안 국장은 강조했다. “한국전쟁에서 백만
명이 희생됐다는데, 진화위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1만6천여 명뿐이다. 전체의 0.0016%다. 수많은 학살지 중 골령골 희생
자만 최소 1천800여 명 최대 7~8천여 명인데, 인정된 희생자는 285명에 불과하다. 지금껏 발굴한 학살지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우린 빙산의 일각만 보고 있다. 이게 한국사회 과거청산의 수준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공동조사단을 꾸리고 유해발굴에 나선 것도 과거사법의 필요성을 직접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안 국장은 말했다. “유족들의 절박함도 알고 있었고, 유해발굴을 통해 ‘이렇게 유해가 많이 나온다. 당신 부모의 유해가
뒷산에 머리인지 다리인지 모르게 겹겹이 쌓여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나’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재작년 아산시에서 보
조금을 받기 전까지 모두 시민사회 힘으로 발굴을 해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주용성 작가
지난 12일 발굴 작업에 참여한 인원은 단장 박선주와 팀으로 활동하는 배우자 박데비를 비롯해 김소현, 김태인, 노원록,
박꽃님, 박정순, 안경호, 윤은정, 조성규, 주용성, 펭보, 홍수정. 국가의 빈자리를 채워준 이들이다. 전숙자 회장은 “이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라며 유족회를 대표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안 국장은 팀원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각자 자
부심이 크고 자발성이 높으니 따로 잔소리할 필요가 없다. 팀워크가 좋다”라고 말했다.
안 국장은 2기 진화위 활동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진화위는 포괄적 과거청산으로서 유일한 국가조사기구다. 이번
재출범을 과거사 진상규명의 큰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미신청 유족들이 많다. 수많은 인권침해 사건들 조사하려면 1기보
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한국전쟁 유족 중 막내가 71세다. 살아계실 때 진상규명과 함께 적절한 배·보상이 이뤄져야 한
다. 민주적 발전과 화합에 사회적 비용은 당연하다”
18일 기준 골령골에서 수습된 유해는 250여 구로, 추가 감식 작업 이후 더 늘어날 예정이다. 2007년 진화위 발굴 작업과
2015년 공동조사단 발굴 작업으로 54명의 유해가 발굴돼 골령골에서 수습된 유골은 300명이 넘는다. 감식 작업이 종료
되면 구역별 유해별로 분류해 입관한 뒤 오는 20일 세종시 추모의집에서 안치식을 진행한다. 골령골 유해발굴이 종료되
면 전국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가 단위 위령 시설이자 평화역사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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